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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차대전 당시 탈영죄로 총살당한 미군 병사.jpg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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에디 도날드 슬로빅, 그는 1920년 미시간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으며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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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릴 적부터 손버릇이 나빠 공장 등에서 물건을 훔쳤고 교도소에 두 번이나 가기도 했으며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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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2년에 가석방된 뒤에 앤투어넷 위즈니스키와 만나 결혼하였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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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집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었으나 

 

유럽 전선이 격화되면서 전사·전상자가 급증하고 미군의 병력 수요도 늘자 징병의 폭이 확대되면서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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징병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체 등급이 현역이고 중범죄 전과만 없으면 모조리 끌어내기 시작하는데, 

 

에디도 이런 이유로 육군에 징병 되었다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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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후 텍사스에 있는 훈련소에 기초훈련을 받고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지만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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본대에서 낙오하여 후방에 있는 캐나다군 육군 부대에서 6주를 보내 탈영죄로 기소되었다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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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소된 슬로빅은 '부대로 복귀하라, 그러면 기소가 유예되고 전출갈수 있다' 라는 군법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을 받겠다고 하였다.

 

그러나, 그의 선택은 제 무덤 파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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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시 그가 소속됐던 육군 제28보병사단은 휘르트겐 숲 전투(Hürtgenwald)를 비롯해 독일 국방군 육군과의 최전선에서 계속 사상자를 내고 있었으며 

 

워낙 전투가 처절한 나머지 정신줄을 놔버린 군인들이 수두룩할 지경이었다.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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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때문에 사단에선 군기를 확실히 세우고 잠재적 탈영병들에게 '탈영한다고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'는 사실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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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국 1944년 11월 11일, 군사재판이 열렸으며 9명의 장교로 된 배심원은 유죄로 판단했고, 슬로빅은 적전탈영죄로 사형이 선고됐다.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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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4년 12월 9일, 슬로빅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에게 감형 청원을 보내지만 12월 23일 기각되었으며..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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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듬해인 1945년 1월 31일 오전 10시 4분에 프랑스 알자스의 생트마리오미느(Sainte-Marie-aux-Mines)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.